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총균쇠를 완독했다

왜 어떤 국가는 부유하고 어떤 국가는 가난한가.

 

왜 유럽인들은 신세계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고, 반대로 왜 신세계의 원주민들은 유럽을 식민지로 만들지 못했나.

 

왜 같은 유라시아 대륙 내에서도 중국이 아닌 유럽이 세계 문명을 주도하게 되었나. 

 

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,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이 "운빨"이라는 것이냐며 이 책을 타박한다면 그것은 작가에게 불공평할 정도로 지나치게 책의 주장을 단순화하는 것 같고, 다만 수많은 우연의 끝에 현재의 결과가 있음을 인정하고 넘어가자는 정도의 주장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. 다시 말해, 마치 자신이 유전적으로 우월해서 현재의 민족적 우위를 누리고 있다는 듯이 건방을 떠는 자들에게 넌 그저 3루에서 태어났을 뿐이야, 라고 팩폭을 날리는 것. 

 

특정 인종(IE 백인)의 우월함이 아닌 주어진 환경이 인류사를 주도했음을 반복해서 증명하는 과정에서, 당연해 보이는 현상조차도 가벼이 넘기지 않고 그 현상이 애초에 존재하게 된 이유를 되물어가는 학문적 호기심이 돋보이는 책이다. 사실 나는 역사에 대한 지식보다도 이부분, 작가의 증명 과정이 가장 감명깊었다. 읽다 보면 핵심 내용이 매우 반복적이라는 느낌도 드는데 꾹 참고 버티다 보면 작가의 논증 과정이 익숙해지면서 더욱 와닿게 되는 효과가 있으니 존버를 추천한다.

 

책의 말미에 나오는 예시인데, 결혼이 폭망했다는 이유로 상담을 받으러 온 남편에게 왜 당신의 결혼이 폭망했냐 물으니, 아내에게 맞았기 때문이라고 한다. 그러나 아내에게 맞았다는 사실은 결혼이 폭망하게 된 "직접 원인 (proximate cause)"일 뿐, 도대체 뭘 했길래 맞았냐고 질문하니 바람을 피워서라고 한다. 바람은 왜 피웠는데? 

 

분석하고자 하는 어떠한 현상의 "직접 원인"으로부터 "근본 원인 (ultimate cause)"으로 다가가고자 부지런히 노력하는 학문적 과정은 인류의 역사를 탐험하지 않더라도 답습해볼만 할 것 같다. 그런 의미에서, 유럽이 인류사에서 핵인싸가 된 이유를 한 줄 요약해 보자면, 총, 균, 쇠 또한 직접 원인일 뿐이고 종국에는 각 민족이 농업을 빠르게 터득하고 또 주변에 전파할 수 있는 지리적, 환경적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문명의 승패를 갈랐다는 것이 책의 결론. 

 

유럽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했기 때문에 현재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 아니듯, 내가 이뤄낸 것들도 단순히 내가 잘난 덕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이 세상의 수많은 우연이 내게 가능하도록 허용해준 것이란 사실을 상기시켜준다. 그럼 내가 이루지 못한 것도 내 탓이 아니야? 결국 인간이란 환경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? 
... 싶기도 하지만, 아마 인류를 그렇게까지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을 것 같고, 책의 내용을 보면 문명의 흐름에 "지리빨"이 다분했다 하더라도 인류 발전의 주체는 인간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다.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고, 주어지는 결과에 대해 겸손하자는 것이 궁극적 레슨인 듯.